인조반정과 병자호란 르포 (마지막회)
인조반정과 병자호란 르포 (마지막회)
  • 당진신문
  • 승인 2008.09.08 14:17
  • 호수 72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 용 삼 / 월간조선 편집국장



제 나라 백성을 포로로 뺏기고 몸값 흥정

청나라는 철수하는 과정에서 주전론을 주장했던 신하들과 엄청난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실록은 ‘온 나라 백성들 중 태반이 연루되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야사(野史)에는 20만~50만이 끌려갔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수치는 당시 조선의 인구 수로 볼 때 다소 과장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조선은 병자호란 당시뿐 아니라 정묘호란 때도 많은 백성이 포로로 끌려갔다. 인조 5년(1627) 5월 16일 실록을 보면 각 지방별 포로의 숫자와 당시 정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평양:포로로 잡혀간 남녀가 2190인, 피살자 158인, 도망쳐 돌아온 자가 344인, 뼈를 묻은 남녀가 1169인.
강동:포로로 잡혀간 남녀 225인, 도망쳐 돌아온 자 67인, 빼앗긴 말과 소가 790마리.
삼등:포로로 잡혀간 남녀 1500인, 피살자 28인, 도망쳐 돌아온 자 111인.>


실록 기록을 근거로 살펴보면 평양, 강동, 삼등, 순안, 함종, 숙천 등 여섯 고을에서만 포로가 4986인, 피살자 290인, 만주로 잡혀갔다가 도망쳐 돌아온 자가 623인이다.


청나라가 이처럼 많은 조선 백성을 포로를 끌어간 이유는 남자의 경우 부족한 노동력을 메우거나 여자의 경우 성적 노리개로 쓰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실상은 돈을 받고 조선에 되팔기 위해서였다. 포로매매 실상에 대해 인조 16년(1638) 3월 11일 좌의정 최명길은 이렇게 말한다.

<신이 심양 관사에 있을 때 (포로로 끌려간) 한 처녀의 값을 정하고 속(贖;돈 주고 사 온다는 뜻)하려 했는데 청나라 사람이 약속을 위반하고 값을 더 요구하자 그 처녀가 칼로 자신의 목을 찔러 죽고 말았습니다. 끝내 그녀의 시체를 사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최명길은 인조 15년 4월 21일에도 포로의 몸값에 대한 보고서를 올린 바 있다.

<우의정 최명길이 보고했다.
“속환하는 일은 오늘날 급한 일입니다. 정묘년 화친(정묘호란 후 형제간의 우의를 맺은 조약)을 약속했을 당시엔 한 사람 값이 겨우 10여 필이었는데, 지금 들으니 10냥으로 올랐다고 합니다. 저들이 약정한 값은 본래 저렴했는데 값이 점점 올라가는 것은 속환을 원하는 사람이 골육의 속환에 다급하여 값의 고하를 따지지 않기 때문에 비싸게 요구하는 폐단을 초래하게 된 겁니다.

한 사람 값을 몇백 금으로 논하는 자도 있다고 합니다. 이럴 경우 가난한 백성은 끝내 속환할 길이 없게 됩니다.
신의 생각에는 조정에서 규칙을 만들어 사람마다의 값을 노소와 귀천에 따라 다소 차등을 두더라도 많은 자의 경우 100냥을 넘지 못하게 하고, 저들이 높은 값을 요구한다면 차라리 버려두고 돌아오는 한이 있더라도 이 액수를 넘기지 못하게 하소서.

이를 어기는 자를 중죄로 논한다면 저들 역시 유익함이 없는 줄 알고 스스로 공평한 값을 부를 것입니다.”>
한 나라의 대신이 제 나라 백성을 이민족에게 빼앗기고 몸값 흥정이나 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청나라에 끌려갔던 여인들은 스스로 탈출하거나 몸값을 지불하고 귀국했다. 조선 여성들이 본국으로 탈출하는 사례가 속출하자 청나라는 “포로 중에 몸값을 지불하지 않고 탈출한 사람을 모두 잡아오지 않으면 또다시 침략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이에 임금은 도망한 사람을 모두 잡아들이라는 쇄환령(인조 19년)을 내리고 다음과 같은 담화문을 발표한다.
<내가 사기를 잘 주선하지 못해 조용했던 강토가 병자, 정묘년의 큰 변란을 당해 군병들은 모두 전사하고 남녀 백성들이 포로로 붙들려 갔으니, 환란의 참혹스러움은 옛날에도 드문 일이다.

내가 그 당시 정의를 다하여 싸울 것을 명령하는 것은 실로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허겁지겁 성을 나와 항복해 오늘 이 지경에 이른 까닭은 구차하게 자신만 온전하려는 계책이 아니라 사실은 온 나라 민생을 다 살리려는 목적에서였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지금 상처는 더욱 심해졌고 백성들은 거듭 화를 당하고 있는데, 이번 쇄송의 일로 온 나라가 놀라움에 떨고 있다.

슬프다. 우리 백성이 이역 땅에 잡혀가 골육을 그리워한 나머지 죽음을 무릅쓰고 도망하기를 마치 그물을 벗어난 토끼가 숲 속으로 뛰어들어가듯 했다. 몸을 숨겨 목숨을 부지하기 바빠 이미 본업도 잃었는데, 일제히 찾아내 결박하여 (청나라로 다시) 보내기를 도적 대하듯 하여 자식은 부모를, 남편은 아내를 이별하고 있다.

헤어질 때에 정리가 극도에 달해 목매어 죽기도 하고 일부러 굶어 죽기도 하며 심지어 수족을 잘라 이별을 보류하는 자도 있다. 추위와 굶주림에 괴로움을 당해 가는 도중이나 옥중에서 죽는 자도 많이 있다. 게다가 관리들이 엄한 독촉에 쫓기고 연루될까 두려워 여행하는 사람을 강제로 붙들어 그의 족속을 대신하여 보내는 일도 있었다.

아, 싸움터에 나가 창을 맞거나 피난하다 포로가 된 것은 얼떨결에 생겼던 일이라 어쩔 계책이 없었을 것이며, 나 역시 손쓸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번 쇄송은 나로 인해 빚어진 일인데도 관리들을 호령하여 결박하는 일을 스스로 하고 있으니, 이 어찌 인민의 부모가 차마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이번 일을 당한 백성들이 아무리 나를 꾸짖고 원망한다 해도 이는 나의 죄이니, 어찌 피할 수 있겠는가.>


불행하여라 조선의 환향녀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쟁에 패하면 가장 비참한 것은 여자의 신세다. 어쨌거나 스스로의 목숨 건 탈출이나 골육이 돈을 주고 사오거나 소현세자가 귀국할 때 많은 포로들이 귀국함으로써 제 나라 백성을 외국에 성적 노리개로 바치는 참극은 면하게 됐다.

그러나 이미 몸을 더럽힌 채 귀국한 여자들에 대한 처리 문제로 조선사회는 한바탕 시끌벅적했다. 포로로 잡혀갔다 돌아온 여자들의 처리 문제가 정국의 중요 이슈로 부각되었으니, 다음은 인조 16년 3월 11일 실록.

<신풍부원군 장유가 예조에 ‘외아들 장선징의 처가 강화에서 포로로 잡혀갔다가 속환되어 지금은 친정 부모집에 가 있다. 그대로 배필을 삼아 선조의 제사를 받들 수 없으니 이혼하고 새 장가를 들도록 허락해 달라’고 보고했다. 전 승지 한이겸은 자기 딸이 사로잡혀 갔다가 속환됐는데 사위가 다시 장가를 들려 한다는 이유로 그의 노복을 시켜 격쟁하여 원통함을 호소했다.


예조가 아뢰기를 “포로로 갔다가 돌아온 사족의 부녀자가 한 둘이 아니니 조정에서 반드시 십분 참작하여 명백하게 결정한 뒤에야 피차 난처한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사람이 부부가 된다는 것은 중대한 문제이니 대신에게 의논하소서.”>

이에 좌의정 최명길이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신이 옛날 노인에게 들으니 선조 시절에 임진년 왜변이 있은 뒤 어떤 종실이 상소하여 이혼을 청하자 선조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답니다.

어떤 문관이 다시 장가들었다가 아내가 쇄환되자 선조께서 후취를 첩으로 삼으라고 명했고, 그 처가 죽은 뒤에야 정실로 올렸다고 합니다. 이외에도 재상이나 조관으로 사로잡혀 갔다가 돌아온 처를 그대로 데리고 살면서 자식을 낳고 손자를 낳아 명문거족이 된 사람도 왕왕 있습니다.

신이 전에 심양에 갔을 때 속환을 위해 따라간 사람들이 매우 많았는데 남편과 아내가 서로 만나자 부둥켜안고 통곡하기를 마치 저승에 있는 사람을 만난 듯하여 길 가다 보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부모나 남편의 돈이 부족해 속환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장차 차례로 가서 속환할 것입니다.

만약 이혼해도 된다는 명이 있게 되면 속환을 원하는 사람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허다한 부녀자들을 영원히 이역의 귀신이 되게 하는 일입니다.


신이 심양으로 갈 때 들은 이야기인데 청나라 병사들이 돌아갈 때 자색이 자못 아름다운 한 처녀가 있어 청나라 사람들이 온갖 방법으로 달래고 협박했지만 끝내 들어주지 않다가 사하보에 이르러 굶어 죽었습니다. 청나라 사람들도 감탄하여 묻어 주고 떠났답니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전쟁의 급박한 상황에서 몸을 더럽혔다는 누명을 뒤집어쓰고서도 밝히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사로잡혀 간 부녀들을 모두 몸이 더럽다고 논할 수 없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최명길의 구구절절한 사연에도 불구하고 실록은 ‘이 뒤로 사대부집 자제는 모두 다시 장가를 들고 다시 합하는 자가 없었다’고 전한다. 극도로 명분론이 득세하던 시절이었으니 자기 딸과 부인을 청나라에 포로로 빼앗기고 새 장가 드는 것이 명분상으로는 옳았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그 기분이 어땠을까. 이 시절 사관도 명분론의 늪에 빠져 최명길의 발언을 비판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신은 논한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으니, 이는 절개가 국가에 관계되고 우주의 동량이 되기 때문이다. (청나라에) 사로잡혀 갔던 부녀들은 비록 그녀들의 본심은 아니었다 해도 변을 만나 죽지 않았으나, 절의를 잃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미 절개를 잃었으면 남편의 집과는 의리가 끊어진 것이니 억지로 다시 합하게 해서 사대부 가풍을 더럽힐 수는 없는 것이다.

최명길은 비뚤어진 견해를 가지고 망령되게 선조 때의 일을 인용하였으니 잘못됨이 심하다. 당시 임금의 명령이 사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아 증거할 만한 것이 없다. 설령 이혼을 허락하지 않은 전교가 있었다 해도 본받을 만한 내용은 아니니 오늘에 다시 행할 수는 없다.


아, 백 년 동안 내려온 나라 풍속을 무너뜨리고 삼한을 오랑캐로 만든 자는 최명길이다.>
제 나라 백성을 지킬 힘이 없어 아녀자와 딸들을 강탈당하고도 정신을 못 차리고 ‘절개’와 ‘사대부 가풍’ 운운하는 발언을 보면 조선시대 선비들의 이율배반적인 모습이 가증스럽기까지 하다.

나라에서는 이들을 ‘환향녀’(還鄕女)라 불렀으니, 환향녀들은 오랑캐 나라에 끌려가 몸 버리고 노예살이 하다 왔건만 집안에서 받아주지 않자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비구니가 되는 사례가 허다했다.

이것이 후일 ‘화냥년’의 어원이 되었으니, 불행하여라 조선의 여인들이여! <끝>